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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학

행동 경제학으로 바라본 금융 습관들

1. 행동경제학에 대한 시선

경제학은 인간을 이성적 존재로 가정해 왔습니다. 전통 경제학에서 말하는 '합리적 경제인'은 항상 최대의 효용을 추구하며, 모든 결정을 수치화하고 계산해 가장 이익이 되는 선택을 합니다. 이러한 전제에 따르면 개인은 현재의 소비와 미래의 필요를 균형있게 고려하고 장기적인 금융 안정을 위해 꾸준하게 저축을 할 것이라 기대됩니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월급을 받자마자 카드값을 갚고, 예적금보다는 온라인 쇼핑 장바구니에 먼저 손이 가는 경험은 누구에게나 익숙할 것입니다.
 
이러한 현실과 이론의 괴리를 설명하고자 등장한 것이 '행동경제학'입니다. 행동경제학은 인간의 선택이 인지적 편향, 감정, 사회적 영향 등 비합리적인 요소에 의해 좌우된다는 점에 주목합니다. 심리학적 실험과 경제적 모델링을 접목해 전통 경제학이 간과했던 인간의 진짜행동을 설명하려 합니다. 특히 금융습관은 이러한 편향의 영향을 가장 직접적으로 받는 분야입니다. 사람들은 단기 보상에 민감하고, 불확실한 미래보다는 눈앞에 즐거움에 더 끌립니다. 저축을 미루는 행위는 정보부족이나 무능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의 본성에서 비롯된 자연스러운 결과일 수 있습니다.
 
행동경제학의 대표 학자 중 한명인 리처드 세일러는 이를 자제력 문제라고 설명했습니다. 그는 사람들이 시간의 흐름에 따라 다른 결정을 내리는 현상을 관찰하며, 우리의 현재 자아와 미래자아가 항상 일치하지는 않는다고 말합니다. 세일러는 "인간은 계획하는 자아와 실행하는 자아, 이렇게 두 개의 자아를 가지고 있다"며 이 둘 사이의 충돌이 저축실패의 주요 원인이라고 분석했습니다. 이는 단순한 금융 교육이나 정보 제공만으로는 개인의 저축행동을 바꾸기 어렵다는 점을 시사합니다.
 

행동경제학으로 바라본 금융습관들

 

2. 지금이 더 중요해 보이는 이유: 현재 편향과 심리적 할인

저축은 본질적으로 미래 이익을 위해 현재의 만족을 포기하는 행위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미래 보상을 실질적으 덜 가치있게 느낍니다. 이 현상을 설명하는 대표 개념이 바로 현재 편향입니다. 행동 경제학자들은 사람들이 미래 이익을 체감하지 못하고 당장의 소비유혹에 쉽게 굴복한다는 점을 반복적인 실험을 통해 증명했습니다.
 
그 중 하나가 하버드대와 MIT의 공동 실험입니다. 참가자들에게 "오늘 1만원 받아갈래"과 "아니면 일주일 더 기다렸다가 다음주에 1만1천원을 받아갈래"라고 했을 때, 많은 이들이 금리 10%의 합리적 선택인 후자를 마다하고 전자를 택했습니다. 그러나 "1년 후 1만원을 받아갈래"과 "아니면 일주일 더 기다렸다가 1년하고 일주일 후 1만 1천원을 받아갈래"라고 하자 대다수는 후자를 택했습니다. 사람들은 미래 일에는 인내심을 보이지만, 현재 선택에서는 참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인간은 심리적 시간 할인을 일관되지 않게 적용하며, 이를 행동경제학에서는 쌍곡 할인이라고 부릅니다.
 
현재 편향은 저축을 장기적인 목표로 인식하지 못하게 만듭니다. 심리학적으로 미래는 멀고 추상적인 대상이며, 그 속의 나는 지금의 나와 동일인물로 느끼지 못합니다. 연구에 따르면, 뇌는 미래의 자신을 낯선 사람으로 인식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실제로 미국 UCLA 신경경제학 연구소의 MRI실험에 따르면 사람들은 미래의 자신을 떠올릴 때 타인을 생각할 때와 유사한 뇌 영역이 활성화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이는 우리가 미래의 행동, 즉 저축을 자발적으로 하기 어려운 이유를 뇌과학 수준에서 설명해 줍니다.
 
이러한 심리적 구조는 금융상품 선택에서도 나타납니다. 예를 들어, 당장 사용 가능한 체크카드보다 장기적립형 펀드나 연금상품은 사람들로부터 훨씬 더 적은 선택을 받습니다. 아무리 높은 수익률을 제시해도 즉각적인 효용이 없으면 행동으로 이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이는 금융교육의 방향성을 단순 정보제공에서 심리적 장벽 해소로 전환해야 함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3. 결심과 행동의 간극: 왜 우리는 내일부터 저축하려 하는가

"다음달부터는 꼭 저축을 시작해야지" 이 문장은 많은 이들이 매달 반복하는 다짐입니다. 그러나 실현되는 경우는 드문 것이 현실입니다. 행동경제학은 이를 시간불일치로 설명합니다. 현재 계획이 미래에도 유지된다는 보장이 없다는 뜻이며, 시간이 지남에 따라 판단기준이 변하면서 스스로 내린 결정을 번복하게 되는 현상입니다.
 
이 개념은 계획자와 실행자의 역할 분리로도 설명이 됩니다. 오늘의 나는 내일의 나를 신뢰하며 계획을 세우지만, 정작 내일의 나는 다시 새로운 핑계를 대고 소비를 택합니다. 이러한 내부충돌은 장기적인 재정 관리에서 두드러지며 내일부터라는 말이 반복될수록 미래의 저축가능성은 더 멀어집니다.
 
또, 자기과신 역시 중요한 장애물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재정관리능력, 미래소득, 건강상태 등을 과도하게 낙관적으로 예측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러한 과신은 "지금은 어려워도 언젠가 상황이 나아질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를 만들고, 현재의 지출을 정당화하는 핑계로 작동합니다. 특히 신용카드나 할부와 같은 지연결제 시스템은 이 과신 편향을 더욱 강화시킵니다. 우리는 미래에 충분히 감당할 수 있다고 믿으며 지금의 구매를 결정하지만 그 결과는 과도한 부채와 저축실패로 이어집니다.
 
실제로 미국 연방준비제도의 조사에 따르면, 미국인의 40%는 비상 시 400달러조차 감당할 수 없다고 응답했습니다. 이 수치는 단지 소득의 문제라기보다는 저축에 실패하는 심리적, 구조적 원인 존재함을 시사합니다. 이는 고소득층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나며 저축률이 소득수준과 반드시 정비례하지 않는다는 점은 행동경제학의 통찰과 정확히 일치합니다.
 

4. 습관이 아닌 구조의 문제: 행동을 바꾸는 금융설계

우리는 종종 "습관을 고치면 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행동경제학은 인간의 행동이 단지 의지나 교육으로 쉽게 바뀌지 않는다고 지적합니다. 오히려 환경설계를 바꿔야 한다고 봅니다. 이는 인간의 인지편향을 교정하려 들지 말고, 그 편향을 전제로 한 시스템을 만들라는 접근입니다.
 
대표적인 성공사례는 미국의 퇴직연금 자동가입제도입니다. 기존에는 직장인이 직접 가입을 신청해야 했지만, 제도를 변경해 자동으로 가입되도록 하고 원할 경우에는 탈퇴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그 결과 연금 가입률은 평균 30%대에서 90%이상으로 급증했습니다. 이는 사람들이 기본설정을 그대로 따르는 경향이 있다는 행동경제학의 가설과 정확하게 일치합니다. 더불어 연금의 평균 수익률도 크게 올랐습니다. 즉 행도의 디폴트를 바꾸면 습관은 저절로 바뀝니다.
 
또다른 효과적인 전략은 자동저축입니다. 월급이 입금되자마자 일정 금액이 저축계좌로 자동이체되는 방식은 저축을 선택이 아닌 시스템화된 행동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이는 자제력을 필요로 하지 않는 장점이 있으며, 실제 핀테크앱들(토스뱅크, 카카오뱅크, 케이뱅크 등) 에서는 이 기능이 중요한 사용자 유지요인으로 작용하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 감정적 보상설계도 저축행동을 촉진합니다. 게임화 요소를 도입해 저축금액에 따라 배지를 제공하거나 목표달성 시 소소한 리워드를 주는 방식은 저축의 즉시만족감을 높여줍니다. 카카오뱅크의 52주 적금이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카카오뱅크는 매일 일정금액이 저축될 때마다 앱 상에서 캐릭터 스티커를 하나씩 모을 수 있도록 제공하는 것은 물론, 1주차나 3주차, 5주차까지 저축을 빠지지 않고 했을 때 상품할인쿠폰, 영화티켓 등을 제시함으로써 국민상품으로 등극했습니다. 본래 지루하고 고통스러운 행동으로 인식되던 저축을 즐거운 도전과제로 바꾸는 심리적 전략입니다.
 
궁극적으로 행동경제학은 다음과 같은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사람은 기본적으로 비합리적입니다. 하지만 그 비합리성은 예측가능하며 설계가능합니다. 따라서 금융습관은 개인의 성격이 아니라 주어진 시스템에 의해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는 영역입니다. 국가 정책, 기업의 상품 설계, 개인의 환경 설정 모두가 이러한 관점에서 접근할 때 더 나은 저축습관을 만들 수 있습니다.